<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영화 최고의 순간에 침묵을 택한 멀티버스 가족 드라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official poster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가족의 어려움과 사랑’이라는 이야기는 사실 아주 새로운 소재는 아닙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도 이미 많지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꺼내놓지 않습니다.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오히려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 가깝게 흘러갑니다. 평범한 세탁소 주인인 에블린이 어느 날 갑자기 우주를 구해야 할 운명에 휘말리고, 우주를 파괴하려는 빌런 조부 투파키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꽤 유쾌한 액션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조금 더 진행되고 나면, 조부 투파키의 정체가 에블린의 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에블린이 벌이는 ‘우주를 구하기 위한 싸움’은, 사실은 딸과의 싸움인 셈입니다. 미국 이민자 가족에게 가족 간의 갈등이 얼마나 깊고 근본적인 위기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우주의 파괴라는 설정에 겹쳐 놓은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를 끊임없이 넘나듭니다. 멀티버스를 이동할 때마다 영화의 장르도 함께 바뀝니다. 음악도 달라지고, 조명도 달라지고, 인물의 성격과 배우의 연기 톤까지 달라집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는, 여러 편의 영화를 한데 섞어 놓은 것 같은 인상입니다. 이런 영화는 자칫하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 쉽고, 관객이 쉽게 피로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경계를 아주 절묘하게 넘나듭니다. 장르는 계속 바뀌지만, 하나의 플롯은 끝까지 유지합니다. 영화가 발산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시 수렴하고, 수렴하는 듯하다가 다시 흩어집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역시 클라이맥스입니다. 영화가 가장 크게 소리를 질러도 될 순간에, 오히려 침묵을 선택합니다. 모든 소리를 끄고 자막으로만 대사를 전달하는 연출은, 극적인 싸움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아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시끄럽게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메멘토>, <덩케르크>, <테넷> 같은 작품에서 시간의 순서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었다면, 다니엘스 감독들은 이 영화에서 메타포와 멀티버스를 사용해 주제를 아예 다른 장르로 바꿔치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형식을 과감하게 흔들고, 이야기를 상징으로 바꿔 전달하는 이 영화는 형식주의 영화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형식을 이렇게까지 가지고 놀면서도, 정작 말하고 싶은 감정은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진부한 주제라도, 이렇게 전달하면 여전히 새로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